한국사
개항의 시작 2편
일본의 도발
그 이전에 일본은 1868년에 메이지 유신을 단행하여 근대 국가를 건설하고 조선과 근대 외교 관계를 수립하기 위한 교섭을 계속했다. 그러나 흥선대원군은 여러 사정으로 이를 거절하였다. 흥선대원군이 사임하자 조선의 계몽 세력이 대외개방을 적극 주장하기 시작했다.
이러한 분위기를 인지한 일본은 포병훈련을 명목으로 조선을 위협하기 위해 군함 3척을 부산항에 파견했다. 또한 운요호는 서울 근교 강화도로 파견되어 조선군의 발포를 유도하였다. 운요호를 막으려던 조선의 수비병들은 일본군에 패하고 말았으며, 강화도의 초지진과 영종도에 상륙했습니다. 일본군은 영종진에서 발포, 살상, 약탈을 하고 후퇴했는데 이것이 바로 운요호사건이었다.
조선인의 도발을 무시하고 이번 사건에 대해 조선에 사과를 요구했다. 일본은 사과를 받아들이는 조건으로 조선 영해의 무료 항행과 강화 인근 개항을 제안했다. 일본은 운요호 사건을 기회로 무력을 동원해 협상을 강력히 요구했다. 마침내 1876년 2월 3일(음력) 전권대신인 신헌과 특명전권판리대신 전권대사 구로다 기요타카가 12조의 조일수호조규 맺었다.
불평등 계약의 시작
개항 이후 민씨 정권은 적극적으로 일본과 청나라의 문을 열려고 했고, 새로운 문화를 받아들이기 위해 신사유람단과 영선사를 보냈다. 그러나 불평등 조약으로 인해 일본과 관세가 없는 무역이 이루어지고 서구 상품이 쏟아져 들어왔다. 관세 없는 서구 상품은 조선의 장인 계급을 무너뜨렸고, 식량과 금은의 유출은 가격을 치솟게 했다. 계속되면서 농민, 중소 상인, 장인의 계층 무너졌다. 특히 쌀 수출은 농민층의 쇠퇴로 이어졌다.
개항 후 사회적 모순이 심화되고 인민생활이 어려워지고 개항 이전에 존재했던 봉건지주계급과의 갈등도 심화되었다. 갈등은 사회 개혁에 대한 요구로 밝혀졌고, 이는 농민 봉기로 이어졌습니다.
조선의 개항은 황실의 국내 학자들의 요구에 부응한 것이기도 하다. 그러나 일본의 공격적인 군사외교라는 대외환경이 개항 자체에 결정적 역할을 했다. 그 결과 발생한 불평등 조약은 조선 사회의 사회적, 경제적 뿌리를 뒤흔드는 기회를 제공했고, 이는 결국 일제의 침략으로 이어졌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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