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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국사

의병장말고 승병장!
전장에서 백성을 구하다
사명대사 유정은 조선중기에 활동한 불교 승려이다. 명종대 승과에 합격하여 직지사 주지 등을 역임하고 임진왜란 때 승병장으로 크게 활약하였다. 청허 휴정의 적전으로 평가받았으며 17세기까지 불교계를 주도하는 사명문파를 형성하였다.

성장과 출가
유정은 7세 때 할아버지로부터 『사략』을 배우고 13세 때 유촌 황여헌에게 『맹자』를 배웠다. 비명에는 이와 같은 세속학문의 한계를 느껴 출가하였다고 되어 있지만 실은 출가 사유가 그 뿐만은 아니었다. 유정은 15세 때 먼저 어머니를 잃고 16세에는 아버지를 잃어 황악산 직지사의 신묵화상에게 출가하게 된다.

출가한 후에 『전등록』을 배웠는데 배운지 오래지도 않았는데 이미 그 뜻을 깨우쳐 나이가 많은 승려들이 오히려 유정에게 와서 물을 정도가 되었다고 한다. 이는 출가 전에 유정이 얼마나 학문적 이력과 소양을 깊이 쌓았는지 시사하는 지점이기도 하다. 유정은 출가한지 불과 2년만인 18세에 신유년(1561, 명종 16) 선과에 합격하였다. 유정이 갖추었던 이러한 식견과 재능으로 인해 당시의 여러 저명한 유학자 문인들, 예컨대 박순, 이산해, 고경명, 최경창, 허봉, 임제, 이달같은 인물들과 교류하게 되기도 한다. 이와 관련하여 유성룡의 문집인 『서애집』에서는 유정이 시에 능하고 해서와 초서도 잘 써서 승려들 사이에서 이름이 높았다고 기록하고 있다.

이후 유정은 직지사 주지 등을 역임하고 선종본사인 봉은사[서울] 주지로 천거되나 이를 사양하고 32세의 나이에 묘향산 보현사에 은거하고 있던 휴정[서산대사]을 찾아가 3년간 참선에 몰두하게 된다. 이후에는 팔공산, 청량산, 태백산, 금강산 등을 유력하며 수행하였으며, 1586년(선조 19) 옥천산 상동암에서 깨달음을 얻었다.

1589년(선조 22) 정여립(鄭汝立) 사건에 연루되었다는 누명을 쓰고 스승 휴정과 함께 관아에 갇히기도 하였으나 지역 유생들의 상소로 무죄 석방되었다.

활동과 업적승병장 활약과 전쟁포로의 송환
1592년(선조 25) 임진왜란이 터졌을 때 유정은 금강산에 머물고 있었다. 전세가 급박해 지고 급기야 선조가 궁을 버리고 의주까지 피난 갔다는 소식이 전해지자, 유정은 스승 휴정의 격문을 받고 의승군 천오백 명을 모아 순안 법흥사로 갔다. 휴정에게 합세한 오천여 명의 의승군 세력은 그 여세를 몰아 명나라 군대와 함께 왜적에게 함락되었던 평양성을 수복하였다.

이 과정에서 승군이 보여준 조직력과 혁혁한 성과는 임금과 조정 대신들에게 깊은 인상을 남겼다. 특히 유정은 휴정의 수제자로서 전란에서 가장 큰 공을 세운 충의의 승려로 명성을 떨치게 된다. 유정은 휴정을 대신하여 전투에 직접 참여하였고 군량 조달 및 산성 축조 등 전쟁 지원 사업과 관련하여 큰 역할을 하였다. 특히 일본군과의 강화교섭 과정에서 조정을 대표하여 파견되었고 정세를 분석하여 대비책을 제시하기도 하였다. 이러한 승병장의 역할은 물론이고 전쟁이 끝난 후에 아무도 가려 하지 않는 왜로의 사신으로 파견되어 국교 재개와 잡혀간 조선인 포로 송환 등에 있어 괄목할 만한 성과를 냈다. 도총섭을 역임한 유정의 공로는 선조에게 높은 평가를 받아 선교양종판사의 직책과 종2품 당상관인 가선대부와 동지중추부사 등을 제수받았다.

승려에게 당상관을 제수하는 일은 당시로서 매우 파격적인 조처였으며 임진왜란에서 유정과 불교계의 공로가 컸음을 조정에서 인정하고 있었음을 보여준다.

1610년(광해군 2)에 세수 67세, 법랍 53세로 입적하여 해인사 서쪽 기슭에 다비하였다. 18세기에 임진왜란기 의승병장의 활약을 높이 평가받아 휴정과 유정 등을 향사하는 국가 공인 사액사가 지정되었다. 유정을 향사하는 곳은 밀양 표충사로 1739년(영조 15) 왕명으로 사액되었다. 이후 스승 휴정을 향사하는 사당으로 1789년 해남 대둔사와 1794년 묘향산 수충사가 사액되자 유정도 휴정 옆에 배향되었다.

저서로는 「송운대사 분충서난록」 과 『사명대사문집』이 남아있다.

출처 - 우리역사넷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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