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국사
수양대군이 칼을 뽑은 사건 2편
대군에 머무를 수 없었던 그릇들
성군 세종의 피를 그대로 물려받아서일까, 세종의 아들들 또한 하나같이 자질이 뛰어났다. 첫째 아들 문종은 세종의 학자적 기질을 그대로 이어받았다. 셋째 아들 안평대군은 문학과 예술에 뛰어났다. 어릴 때부터 시·서·화에 모두 능하여 삼절이라 불리기도 하였다. 당대 제일의 서예가이기도 했던 안평대군은 문인 층의 절대적 지지를 얻고 있었다. 단종 즉위 초기 황보인, 김종서 등 대신들과 연합하여 실권을 휘두르는 등, 정치적 기량 또한 원숙했다.
문종과 안평대군이 문에 치중된 인재들이었다면, 둘째 아들 수양대군은 무를 대표하는 인물이었다. 그는 어릴 때부터 뛰어난 무예를 자랑하여, 세종이 강무할 때에 16발의 화살로 16마리의 사슴을 잡아, 신기에 가까운 활 솜씨를 가졌던 태조를 닮았다는 찬사를 듣기도 했다.
북한산과 같은 험준한 산세를 가진 곳도 마치 평지를 걷는 것처럼 쉽게 내려왔다고도 하니, 타고난 신체 능력과 후에 연마한 기술이 모두 뛰어났다는 점을 알 수 있다.
성품 또한 뛰어난 무예 실력에 어울리게 괄괄하고 호방하였으니, 그가 무사들이 추앙하는 대상이 된 것은 너무나도 당연한 일이었다.
어린 단종이 왕위에 오르자, 대신들의 권한이 점차 비대해지기 시작했으며 대신들과 연합한 안평대군도 정국을 좌지우지하는 실권자로 떠올랐다. 수양대군도 물론 자신의 세력을 더욱 규합하기 시작하여, 두 대군파의 갈등은 최고조에 달하였다. 나이 어린 단종에 비해 세종의 아들 여덟 대군이 지나치게 뛰어난 것을 우려하는 목소리들이 높아졌다.
특히 수양대군에게는 전략을 가다듬을 모사꾼이 필요했는데, 그런 그에게 한명회와의 만남은 마치 물고기가 물을 만난 것과 같았다. 권람의 소개로 한명회를 만난 수양대군은 마치 옛 친구를 만난 것처럼 반가워하였으며, 한명회를 두고 자신의 장자방이라 칭하였다고 한다. 처음 만난 자리에서 한명회는 수양대군에게 중요한 간언을 한다. 국가에 어린 임금이 있으면 반드시 옳지 못한 사람이 정권을 잡게 되니, 이때에는 항상 충의로운 신하가 있어서 반정을 하는 것이 천도에 부합한다고 이야기한 것이다.
한명회와의 만남은 이미 왕위를 바라보고 있었던 수양대군의 마음을 더욱 굳히게 하였을 것이다. 그는 한명회의 조언을 받아들여 홍달손, 양정 등의 무사 세력을 더욱 규합하였다.
수양대군과 안평대군, 그리고 대신 세력이 각축하던 세력 경쟁은 드디어 일촉즉발의 상황까지 다다랐다. 단종이 즉위한 해 9월 명에서 고명책인을 보내준 것에 대해 사은사를 파견해야 하는 때였다. 수양대군이 사은사로 결정되자, 권람과 한명회 등은 수양대군이 명으로 떠나있을 때, 상대편 세력이 움직일 것을 극도로 경계하여 떠나려는 수양대군을 만류하였다.
이는 당시 어느 한쪽이 먼저 움직여도 이상할 것이 없는 상황이었다는 점을 보여준다. 이에 수양대군은 황보인이나 김종서는 호걸이 되지 못해 움직이지 못할 것이며, 안평대군 또한 자신의 적수가 되지 못한다며 이들을 안심시켰다.
몰아치는 피바람
명에 다녀온 후 1453년(단종 1) 수양대군은 마침내 상대 세력을 제거하기로 결심하고, 10월 10일에 거사하기로 주위 인물들과 약정하였다. 상대 진영 또한 수양대군이 곧 움직일 것이라는 점을 알고 있는 상황이었으나, 수양대군은 상대 진영이 수적으로 열세이므로 걱정할 것이 없다고 자신하였다.
바야흐로 10일 아침, 수양대군은 권람, 한명회, 홍달손 등을 불러 거사 계획을 확인한 후, 강곤, 홍윤성, 임자번, 안경손, 홍순로, 민발, 곽연성 등을 모아 그날의 거사를 의논했다. 그러나 아직 계획에 이견이 있어, 몇몇은 국왕에게 먼저 아뢴 후에 거사를 진행해야 한다고 주장하였다. 결국 수양대군은 만류를 뿌리치고 직접 활을 들고 일어나 집을 나섰다.
수양대군이 먼저 노린 것은 대신 중의 실세 김종서였다. 김종서는 당시 ‘큰 호랑이’라 불릴 정도의 실력자였기 때문에, 그를 먼저 없앨 수 있다면 거사에 큰 탈이 없을 것으로 판단하였던 것이다. 수양대군은 갑옷을 속에 입고 수하 몇 명과 함께 김종서의 집에 이르렀다. 김종서는 그를 의심하여 집안으로 수양대군을 들이고자 하였으나, 수양대군은 한사코 집 밖에 머물렀다. 김종서의 아들 김승규 또한 이상한 낌새를 눈치 채고 수하들과 함께 김종서의 곁을 떠나지 않았다. 수양대군은 꾀를 내어 김종서에게 사모뿔을 하나 빌려 달라 청하여 김승규를 집으로 들여보낸 후, 은밀히 의논할 것이 있다며 신사면, 윤광은 등을 멀리 물리치도록 하였다. 김종서의 호위가 모두 사라지자 마침내 철퇴가 김종서를 내리쳤다. 거세게 몰아칠 피바람의 시작이었다. 놀라 뛰어나온 김승규마저 칼로 찔러 쓰러뜨렸다.
이어 수양대군은 궁궐로 향하여 입직승지 최항을 불러 김종서가 반역을 일으키려 하여 사세가 급박하므로 임금에게 미처 아뢰지 못하고 그를 죽였다고 고하였다. 단종이 그에게 살려달라고 애원하자 수양대군은 왕명으로 대신들을 부르도록 하여, 황보인, 조극관, 이양 등을 궁문에서 때려죽였으며, 그 일파인 윤처공, 이명민, 민신 또한 사람을 보내어 제거하였다. 자신의 동생으로 정치적 라이벌인 안평대군을 강화에 압송한 후, 결국 사사하였다. 정분 , 조수량, 안완경 등도 귀양보냈다가 죽였다.
또한 함길도절도사로 있던 이징옥을 김종서의 일당이라는 이유로 파면하고, 그 후임에 박호문을 임명하였다. 이징옥은 오히려 박호문을 죽인 후, 종성을 근거지로 하여 스스로를 대금황제라 칭하면서 반란을 일으켰으니, 이를 ‘이징옥의 난’이라 한다. 그러나 이징옥은 미처 세조에게 위협조차 해보지 못하고 종성부사 정종의 반간계로 살해당하였다.
출처 - 우리역사넷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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