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국사
이성계의 선택
이성계, 권력을 장악하다
위화도회군은 1388년에 우왕의 명을 받아 요동을 공격하기 위해 진군했던 이성계 등이 압록강 가운데에 있는 위화도에서 회군하여 우왕과 최영을 제거하고 고려의 실권을 장악한 사건이다.
위화도회군의 대내적·대외적 배경
14세기 중엽 원이 점점 쇠퇴하자 동아시아는 혼란기에 접어들었다. 당시 즉위한 공민왕은 이 기회를 틈타 원의 간섭에서 벗어나고자 시도하여 몽골의 고려침입 이후 원에 빼앗긴 쌍성총관부를 회복하고, 원과 결탁하여 행패를 부리던 기철 등의 무리들을 쫓아냈다. 또한 원을 몽골 고원으로 쫓아내고 중국 본토를 새로이 장악한 주원장의 명과 새로이 외교관계를 맺었다.
명과 고려의 관계는 처음에는 유화적이었으나 갈수록 악화되어 갔고, 친명적이었던 공민왕이 시해된 이후 더욱 얼어붙었다. 공민왕 사후 집권한 이인임 정권은 명과 사대관계에 있으면서 북원과도 외교관계를 유지하는 등거리 외교를 시도하였고, 이는 명의 의심을 샀다. 또한 공민왕은 세 차례 군대를 보내어 북원이 지배하고 있었던 요동 지방을 공격하였다. 아울러 요동 지방에 사는 주민들을 적극적으로 고려로 끌어들이려 하였다. 이런 상황에서 명의 세력이 요동에 뻗어가면서 명과 고려의 갈등은 더욱 증폭되었다.
이외에도 고려는 중대한 문제에 봉착해 있었다. 원말에 중국 남방에서 일어난 반란군인 홍건적의 일파가 고려에 침입하여 개경을 함락시키는 등 큰 피해를 주었으며, 왜구는 고려의 연해지방을 거의 초토화시키다시피 했다. 또한 권세가들은 남의 토지를 빼앗고 양민을 노비로 삼아 농장을 만들었고, 일반 농민들은 토지를 잃고 유망하거나 권세가의 농장에 들어가게 되었다. 권근은 당시 끊이지 않는 왜구의 침입과 자연재해, 권세가들의 토지겸병과 가혹한 수탈로 인해 많은 백성들이 죽어가는데도 조정에서는 이에 마땅히 대처하지 못하고 있다고 통탄하였다.
고려 사회의 내우외환 속에서 새로운 세력들이 성장했다. 잦은 외침을 극복하는 과정에서 무장들이 영웅으로 떠올랐는데, 그 중에서도 대표적인 존재가 태조 이성계와 최영이었다. 이성계는 쌍성총관부의 유력자였던 환조[이자춘]의 아들로서, 공민왕이 쌍성총관부를 원으로부터 회복할 때 아버지와 함께 고려에 귀순했다. 이후 장군으로서 휘하 장병을 거느리고 전투마다 승승장구하며 큰 공을 세웠다. 그는 실력으로 출세한 지방 세력가의 아들로서, 떠오르는 신세력의 대표자였다. 반면 최영은 30년 동안 왜구를 토벌하여 홍산에서 왜구를 대파하는 등 명성이 드높은 백전노장이었다. 그는 개인적으로는 “황금 보기를 돌같이 하라”는 부친의 유훈을 종신토록 지킬 만큼 청렴 강직하였으나, 기본적으로는 권문세족 출신으로서 구세력의 대표자였다.
고려 사회의 내부적 문제를 개혁할 주체로서는 신진사대부들이 성장하고 있었다. 고려 말 신진사대부들은 대체로 과거를 통해 관직에 진출한 인물들로서, 지방의 중소지주 출신이 많았고, 새로운 사상으로서 원에서 건너온 성리학을 수용하였다. 이들은 고려사회를 개혁하려는 뜻을 품고 있었으나, 우왕 대에 이인임 정권이 북원과 외교관계를 재개하는 것을 반대하다가 관직에서 쫓겨나는 시련을 겪었다. 이에 신진사대부들 중 급진파는 신흥 무장 세력으로 떠오르던 이성계와 결탁하여 새로운 시대를 모색하였다. 특히 정도전은 이성계의 군영에 직접 찾아가 그를 만났으며, 이성계의 군대가 질서정연함을 보고 자신의 기대를 시로써 표명하기도 하였다.
1387년(우왕 13년)에 최영과 이성계는 협력하여 이인임 일파를 몰아내고 최영이 재상인 문하시중, 이성계가 부재상인 수문하시중이 되어 정권을 장악하였다. 그러나 국정을 책임져야 할 우왕은 사치에 빠져 있었고, 최영과 이성계 사이에는 향후 정국의 방향을 둘러싼 의견대립이 있었다. 최영은 이인임 정권을 몰아내는 과정에서 많은 사람을 처형시켰으나, 이성계는 주모자 이외에는 처형을 피하자고 주장하였다. 또한 정도전, 조준 등 급진파 신진사대부들과 연결된 이성계와는 달리 최영은 신진사대부들의 등용에 부정적이었다. 이는 이인임 정권과 연결되어 있던 사대부들의 처우에 대한 이견을 낳았다. 또한 최영은 정권의 최고책임자였던 이인임에 대해서는 귀양을 보내는 비교적 약한 처벌을 내렸는데, 당시 사람들은 정직한 최영이 사사로운 정을 두었다고 비판하였다.
요약하자면 고려는 요동 문제를 놓고 명과 외교적으로 대립하고 있었으며, 사회적으로는 전란과 권세가들의 토지겸병으로 인해 피폐해 있었다. 이런 상황에서 구세력을 대표하는 최영과 급진파 신진사대부들의 지지를 받는 이성계는 향후의 국정방향을 놓고 미묘한 의견대립을 보이고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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