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국사
붉은 두건의 도적들!
붉은 두건의 도적들, 고려로 밀려오다
홍건적은 14세기 중반, 즉 원 말기에 강남 일대에서 일어난 농민반란군이다. 이들 중 한 갈래는 북중국과 요동 일대를 거쳐 1359년과 1361년 두 차례에 걸쳐 한반도를 침입하였다. 여기서는 홍건적이 발흥하게 된 배경과 중국 대륙에서의 움직임, 그리고 그들이 고려로 향하게 된 경과를 우선 살펴보고, 두 차례에 걸친 침입과 격퇴의 과정을 추적해보겠다. 아울러 홍건적의 난이 고려 국내의 정치와 원과의 대외관계 등에 미친 영향을 확인해보겠다.
한반도로 튄 불똥 - 홍건적의 1차 침입
1359년에 홍건군은 요양을 중심으로 한 요동 일대를 휩쓸고 있었다. 원 조정에서도 토벌군을 조직하여 홍건군과 대대적인 전투를 벌였고, 요양을 수복하기도 하였다. 이에 홍건군은 방향을 남쪽으로 돌려 한반도로 침입해 들어왔다. 이들을 우리 역사에서는 ‘홍건적’이라 기록하였다. 그해 11월에 홍건적 3천여 명이 압록강을 건너와 약탈을 하고 돌아간 것이 그 신호탄이었다. 곧이어 12월에는 모거경이 이끈 홍건적 4만 명이 얼어붙은 압록강을 건너와 의주를 함락시켰고, 곧바로 다음날에는 정주와 인주까지 함락시켰다. 홍건적의 남하는 계속되었다. 그들은 압록강을 건넌 지 20일 만에 서경을 점령하기에 이르렀다. 서경은 고려에서 건국 초기부터 정치와 군사 면에서 큰 비중을 차지하는, 말하자면 고려 제2의 수도와 같은 곳이었다.
그렇다면 홍건적은 경험과 지식도 없는 상황에서 왜 한반도를 침입하였을까? 우선 전략적 이유를 생각할 수 있다. 당시 홍건적은 고려를 원의 동맹자로 인식하고 있었던 것으로 보인다. 따라서 고려를 공격함으로써 그 배후의 요동을 안정화시키려는 전략을 취하였던 것이다. 또 하나의 원인은 홍건적이 고려를 피난처로 생각했다는 점이다. 실제로 요동의 군사적 대치가 긴박하게 전개되던 상황에서 홍건적들에게 고려는 좋은 안식처로 생각되었다.
고려군은 발 빠르게 대응하였다. 홍건적 침입 초기에는 경복흥, 안우 등 공민왕 측근의 인물들이 출전하였다. 그러나 홍건군의 거센 기세를 감당하지 못하고 서경까지 밀리고 말았다. 고려는 곧 대대적으로 병력과 말을 동원하는 등 거국적인 대응에 돌입하였다. 그러는 한편으로 개성에서는 피난을 준비하기도 하였다.
고려군은 곧바로 반격에 돌입하였다. 1360년 1월에는 양군이 각각 수천 명씩의 전사자를 내는 치열한 공방 끝에, 고려군은 빼앗긴 지 20일 만에 서경을 수복하는 전과를 거두었다. 뒤이어 안우, 이방실 등이 이끈 고려군은 함종에서, 그리고 선천군에서 홍건군을 크게 격파했다. 함종에서의 전투 성과를 『고려사』에서는 다음과 같이 묘사하였다.
“판개성부사 신부와 장군 이견이 전사했다. 그러나 각 부대들이 힘껏 싸워 적군 2만 명을 죽이고 자칭 원수인 심자와 황지선을 사로잡았다.”
이 전투 이후로도 홍건적을 완전히 몰아내는 데에는 두 달 정도가 더 걸렸다. 홍건적은 물러나면서까지 서북 지역에 처참한 피해를 입혔다. 압록강을 건너 후퇴한 홍건적을 고려군은 더 이상 추격하지 않았다. 그해 4월, 전쟁에 승리하고 개선한 신하들에게 잔치를 베푸는 자리에서 공민왕이 승리의 기쁨을 표현했던 모습은 다음과 같이 기록되어 있다.
“여러 신하들을 불러 잔치를 베풀고, 이방실에게 옥띠와 옥갓끈을 하사하였다. 공주가 아뢰기를, ‘전하께서는 어찌 이토록 지극한 보배를 아끼지 않으시고 남에게 주십니까?’ 하니, 왕이 이르기를, ‘우리 종사가 구렁텅이에 빠지게 되지 않고 백성들이 어육이 되지 않은 것은 모두 이방실의 공로입니다. 내가 비록 내 살을 베어 주더라도 오히려 다 보답할 수 없을텐데, 하물며 이 물건 정도를 아까워하겠습니까.’라고 하였다.”
홍건적의 대대적인 2차 침입
홍건적은 일단 압록강을 건너 물러났지만 그 세력이 완전히 뿌리뽑힌 것은 아니었다. 요동 일대로 후퇴했던 홍건적은 이후에도 간헐적으로 들어와 고려의 서북면 지방을 노략질하였다. 고려에서는 이공수, 주사충 등을 원에 파견하여 대륙의 정세를 살펴보도록 하였으나, 그들은 항상 심양에서 길이 막혀 돌아오고 말았다. 이로써 고려 조정은 한반도에 침입했던 홍건적이 몽골제국 전체에 퍼진 반란군 세력 중 일부였음을 알게 되었다. 따라서 고려는 1356년의 반원개혁정치 이후 소원해졌던 원과의 관계를 복원하여 홍건적에 공동으로 대응하고자 하였다. 그 조치의 일환으로 원에 사신을 파견하여 우호적인 뜻을 표명하였고, 또한 정동행성에 관원을 다시 배치하였다. 그리고 국내의 수비를 강화하기 위해 각도의 군비 현황을 점검하고 병력을 신속하게 동원할 수 있는 체제를 정비하였으며, 지배층들로부터 말을 징발하기도 하였다.
그러던 중 1361년 10월에 홍건적은 두 번째로 압록강을 건너 한반도를 침입하였다. 이번에는 1차 침입 때보다 훨씬 규모가 컸다. 반성·사유·관선생·주원수 등이 거느린 10만의 대군이었던 것이다. 홍건적은 침입을 시작한 지 1개월 남짓 만에 개경을 압박하였다. 이에 공민왕은 피난길에 오르게 되었다. 당시의 급박한 상황에 대해서 『고려사』에서는 “어가가 남쪽으로 떠나는데, 공주는 연을 버리고 말을 탔으며 차비 이씨가 탄 말은 파리하고 연약하기 짝이 없어 보는 사람이 다 눈물을 흘렸다.”라고 묘사하였다.
공민왕을 비롯한 고려 조정은 복주, 즉 지금의 안동으로 피난지를 정하였다. 복주는 북쪽의 홍건적이나 남쪽의 왜구 등으로부터 방어하기 좋은 분지 지형이었으며 경상도 교통의 요지로 물산이 풍부했던 점, 그리고 왕실을 비롯해서 홍언박 등 고려의 중신들과 깊은 관련을 지닌 곳이었다는 점에서 피난지로 선택되었다. 공민왕은 복주에 머물면서 자주 영호루에 나아가 군사훈련을 참관하였다고 하는데, 지금까지도 공민왕이 친히 썼다고 하는 영호루의 현판이 전해지고 있다.
공민왕이 개경을 떠나고 5일 만에 홍건적은 기어이 개경을 함락시켰다. 이후 개경에 머물면서 홍건군은 잔학한 행동을 거듭하였다.
“적군은 개경을 함락한 후 수 개월 동안 진을 치고 머물면서 말과 소를 죽여 그 가죽으로 성을 쌓고는 물을 뿌려 얼음판을 만들어 아군이 기어오르지 못하게 했다. 또 남녀 백성들을 죽여 구워 먹거나 임신부의 유방을 구워 먹는 등 온갖 잔학한 짓을 자행했다.”
공민왕과 고려 조정은 광주, 충주 등을 거쳐 12월 복주에 도착하였고, 이후 반격을 준비하였다. 우선 정세운을 총병관으로 임명하고, 전국 각지에서 근왕병을 모집하였다. 또한 국내 각 지역에서 군사를 일으켜 배후에서 홍건적을 격파하는 전과가 이어졌다. 반격의 채비를 마친 고려군 20만은 이듬해인 1362년 1월에 개경의 교외에 진을 치고 개경을 포위하였다. 1월 18일 새벽부터 벌어진 전투는 치열하였다. 이 한 번의 전투로 홍건적 20만 가운데 절반은 전사하고, 나머지 절반은 압록강을 건너 도망쳤다. 그 성과에 대해서 『고려사』에는 “저희끼리 밀고 밀치다 죽은 적들의 시체가 가득했고 10만이 넘는 적들의 머리를 베었으며 원나라 황제의 옥새와 금은보화, 금·은·동으로 만든 인장, 무기 등의 물품을 노획했다. 그 잔당인 파두반 등 10여만 명은 압록강을 건너 도망쳐 버리니 적도들이 드디어 평정되었다.” 라고 전한다. 이로써 홍건적의 2차 침입은 마무리되었다.
출처 - 우리역사넷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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