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국사
단심가의 정몽주
고려를 향한 일편단심, 선죽교에서 쓰러지다
“이 몸이 죽고 죽어 일백 번 고쳐죽어”로 시작하는 단심가의 저자 정몽주. 명운이 다해가는 고려왕조를 위해 목숨을 바쳤던 그는 오늘날 한국인들에게 충신의 대명사로 회자되고 있다. 정몽주가 활약하던 시기 고려는 정치·사회·문화 전반에 걸쳐 급격한 변화를 직면하고 있었다. 정치적으로 중국대륙을 지배해오던 원이 쇠락하고 신흥 왕조 명이 대두함에 따라 국제질서가 재편되었고, 이러한 흐름에 발맞추어 고려 내부에서는 국정을 쇄신하려는 움직임이 나타났다. 사회적으로는 개혁정치를 갈망하던 신진세력들이 대거 중앙정계로 진출하여 기득권층과 충돌하였으며, 이들이 근간으로 삼던 성리학이 새로운 시대사조로 자리매김한 결과 문화적 차원의 변화 또한 수반되었다. 이처럼 한 치 앞을 예측하기 힘든 격변의 시대 한가운데에 선 정몽주는 고려왕조에 대한 절의를 최고의 가치로 여기며 안타까운 생애를 마감하였다.
이성계와 정몽주, 공조와 이반의 갈림길에 서다
애초 이성계와 정몽주는 우호적인 관계에 있었다. 1364년에 정몽주와 함께 삼선·삼개 세력을 제압한 이후 이성계는 그를 신임하여 전쟁터에 나갈 때마다 그를 데리고 갔고, 기회가 주어질 때마다 그를 천거하였다. 정몽주 또한 이성계 세력이 갖는 문제의식에 동조하였다. 온갖 폐단의 온상이었던 불교를 비판하거나 명과의 통교를 추진하는 과정에서 그는 윤소종·정도전 등 이성계 세력의 핵심인물들과 뜻을 같이 하였다. 또한 정몽주는 위화도회군의 정당성을 인정하였던 것으로 보이는데, 창왕에게 이성계에 대한 특혜를 요청하고, 공양왕을 옹립하는 일에도 가담한 행적이 이러한 추측을 뒷받침한다. 비록 토지제도를 개혁하는 문제에서는 이성계와 이색 어느 편도 들지 않고 모호한 입장을 취하였으나, 분명 공양왕이 즉위하기 전까지 정몽주는 이성계 세력과 공조관계에 있었다고 할 수 있다.
공양왕의 즉위 이후 이성계와 정몽주는 점차 다른 길을 걸어가기 시작한다. 정몽주는 이성계의 야욕이 국왕을 교체하는 데에서 그치지 않을 것임을 직감하고 그에 대한 견제를 시작하였다. 우선 이초의 옥을 빌미로 이성계 세력이 정적 이색을 맹렬히 공격하자 정몽주는 이색·권근을 사면해달라는 요청을 하였고, 죄상이 분명히 밝혀지지 않은 시점에 다시 죄를 물어서는 안 된다는 주장까지 펼쳤다.
다음으로 창왕을 옹립한 죄로 공격받고 있는 이색을 구명하기 위해 공양왕이 조민수의 협박에 의한 불가피한 선택이었다는 동정론을 펴자, 정몽주 또한 그 견해에 동조하였다. 당시 정몽주는 공양왕을 설득하여, 또 다시 이색의 죄를 묻는다면 무고죄로 다스린다는 내용의 문서를 작성하였다.
1392년에 정몽주는 이성계가 말에서 떨어져 거동이 불편한 상황을 틈타 이성계 세력을 숙청하려 한다. 그는 자신을 지지하는 김진양·이확·이래·권홍·유기를 이용해 조준·정도전·윤소종 등을 탄핵하였다. 이어 이들에 대한 극형을 요구함과 동시에 이성계를 살해할 계획까지 세웠다.
정몽주의 시도는 이성계의 아들 태종[조선]이 개입함에 따라 실패로 끝났다. 일찍이 이방원은 이색보다도 정몽주가 자신들에게 위협이 된다는 것을 예견하였다. 이에 이성계의 동생 이화 및 사위 이제와 모의하여 정몽주를 제거할 계획을 세웠고, 정몽주가 이성계를 만나고 돌아가는 길에 조영규·고여 등을 보내 그를 암살하였다.
그의 나이 쉰여섯이 되는 해였다. 일설에는 이방원으로부터 소식을 전해들은 이성계가 대신을 함부로 죽였다는 사실에 분개했다고 하는데, 실상은 알 길이 없다. 다만 조선 건국 이후 하륜이 정종[조선]에게 이방원이 없었다면 정몽주의 난을 다스리지 못하였을 것이라 이야기한 사실을 근거로 정몽주 암살의 주모자가 분명 이방원이었음을 확신할 수 있다.
이로써 고려는 왕조의 마지막 수호자를 잃었다. 정몽주가 죽은 직후 그를 지지하던 인물들은 모두 국문을 당한 뒤 유배되었으며 이미 정계에서 축출된 이색 세력들에 대해서도 강도 높은 탄압이 가해졌다. 이윽고 같은 해 7월, 이성계 세력의 압력을 견딜 수 없게 된 공양왕이 왕위를 내려놓음으로써 고려왕조는 500년 가까이 이어져 온 장대한 역사를 끝맺게 된다.
출처 - 우리역사넷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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