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국사
목화씨의 등장 문익점 2편
공민왕 폐위사건과 중국 사행
공민왕 폐위사건에 대해서 『고려사』 덕흥군 열전에는 다음과 같이 기록되어 있다. “기철이 처형을 당하자 기황후는 공민왕에게 앙심을 품었다. 마침 고려 사람 최유가 원나라에 있다가 불량한 무리들과 함께 황후를 꼬드겨 공민왕을 모함하여 폐위시키고 타스테무르를 왕으로, 기삼보노를 원자로 옹립하려고 모의하고, 원나라에 있는 모든 고려 사람들에게 거짓 관직을 주었다. 또 요양성 군사 1만을 징발할 것을 청하여 압록강을 건너 수주의 달천에 이르렀다가 아군에게 패하였다.”
또한 이 사건을 주동한 인물로 지목된 최유의 열전에는 다음과 같은 내용이 전한다. “ 황후가 왕에게 원한을 품은 것을 알고, 또한 김용이 안우 등 여러 장수들을 살해하고서는 내응할 것으로 믿었다. 마침내 불량한 무리들과 함께 기황후를 설득해 왕을 폐위시키고 덕흥군을 세우려고 음모를 꾸미고는 거짓으로 상주하기를, 홍건적의 난 때 고려가 국인을 잃어버리고는 새 인장을 멋대로 만들어 쓰고 있다고 하였다. 원나라에서는 덕흥군을 왕으로 세우고 기삼보노를 그 원자로 삼았으며, 김용은 판삼사사로 삼았고, 최유는 스스로 좌정승이 되었다. 원나라 수도에 있는 고려 사람들은 모두 가짜 관직을 받았다. 또한 요양성의 군대를 고려로 출동시키도록 요청했다.”
덕흥군과 최유의 군대가 고려를 압록강을 건너 침입한 것은 1364년 정월 초하루의 일이었다.
그러나 공민왕 폐위의 소식이 고려에 전해진 것은 그보다 훨씬 앞선 1362년 12월의 일이었다. 이에 고려 조정에서는 공민왕 폐위의 부당함을 호소하는 적극적인 외교를 펼쳤다. 1363년 3월에는 기황후의 외종사촌이었던 이공수와 허강을 파견하여 진정표를 올리게 하였다.
또한 4월에는 홍순과 이수림을 파견하여 고려의 백관기로가 원의 중서성과 추밀원, 어사대에 보내는 서한을 전달하게 하였다.
『태조실록』에 실린 문익점의 졸기에 따르면 이 무렵 문익점은 좌정언으로서 서장관이 되어 계품사 이공수를 수행하여 원에 파견되었다고 한다. 서장관이란 외교문서를 담당하는 직책으로, 외교사절단 내에서는 정사, 부사에 이은 세 번째 직위였다. 그런데 『고려사』에 실린 임박의 열전에 따르면, 임박 역시 이공수의 서장관으로 수행하였다고 하여 『태조실록』의 기록과 일치하지 않는다.
어쨌거나 문익점이 중국에 파견되었던 시점으로 보아 그의 임무가 공민왕 폐위사건과 관련이 된 것임은 분명하다.
당시 원 조정에서는 고려에서 여러 차례 파견한 사신들을 억류하고서는 덕흥군 편에 설 것을 회유하였다. 이 가운데 이공수는 고려를 떠나면서 “우리 임금이 복위되지 않으면 저는 죽어도 돌아오지 않겠습니다.” 라고 했던 다짐처럼 기황후와 황태자의 집요한 설득을 뿌리치고 공민왕을 지원하였다. 반면에 유인우와 강지연, 안복종 등은 덕흥군 편에 서서 고려를 침입하는 데 가담하기도 하였다. 이때 원 조정에서는 고려의 사신들에게 높은 관직을 내려주며 회유하였는데, 문익점도 이때 덕흥군 측으로부터 관직을 받았다고 한다.
그러나 그가 고려 침공군과 행동을 같이 하지 않았던 것을 보면 덕흥군 측에 적극 동조하지는 않았던 것으로 보인다.
공민왕 폐립사건은 고려에서 덕흥군의 침공군을 무력으로 물리침으로써 막을 내리게 되었고, 원은 공민왕의 복위조서를 보내며 이를 공식화하였다. 이로써 이공수를 비롯한 고려 사신들도 귀환하게 되었고, 문익점도 그 가운데 한 명이었다.
목면의 전래와 보급
그런데 『삼우당실기』에는 문익점이 원에 머물던 시절에 대해 다른 기록을 전한다. 문익점이 덕흥군 편에 가담하기를 거부하다가 교지, 즉 지금의 운남 일대로 귀양을 갔다가 돌아오는 길에 중국 강남 지역에서 목화씨를 얻어왔다는 것이다. 그러나 이 기록은 후대에 미화된 것으로 보인다.
첫째, 문익점이 덕흥군 정권이 내려준 관직을 받아들였다고 한 데에서 보이듯이, 최소한 덕흥군 편에 가담하기를 거부했던 것은 아니라는 점이다. 이 점은 그가 귀국 후에도 문제가 되어 공민왕대에는 더 이상 관직생활을 이어가지 못했던 데에서도 알 수 있다. 둘째, 당시 중국의 강남 일대는 장사성, 진우량 등 한족 군웅들이 점거하고 있었으므로 운남까지 여행하기란 쉽지 않았으리라는 점이다. 셋째, 그 무렵 목면이 중국의 강남지역에서 주로 재배되었던 것은 사실이나 화북 지역에서도 목면의 종자를 구할 가능성은 충분했다는 점이다. 한 가지 덧붙이자면 문익점이 목화씨를 붓뚜껍 속에 넣어 숨겨가지고 돌아왔다는 이야기도 근거는 뚜렷하지 않다. 『태조실록』의 기록에는 그가 목화씨를 “주머니에 넣어서” 가지고 왔다고 한다. 목화씨 도입에 얽힌 이 일화 역시 후대에 첨가된 내용인 것으로 보인다.
앞서 언급했듯이 문익점은 귀국 후 원나라에서 덕흥군 편에 선 전력이 문제가 되어 중앙 정계에서 물러나게 되었다. 1364년 그는 고향인 진주로 내려가 목면 재배를 시도해보게 되었다. 이에 대해서 『태조실록』에서는 다음과 같이 전한다. “갑진년에 진주에 도착하여 그 씨 반을 그 고을 사람으로서 전객령으로 관직에서 물러난 정천익에게 이를 심어 기르게 하였더니 다만 한 개만이 살게 되었다. 정천익이 가을이 되어 씨를 따니 백여 개나 되었다. 해마다 더 심어서 정미년(1368년) 봄에 이르러서는 그 종자를 나누어 마을에 주면서 권장하여 심어 기르게 하였는데, 문익점 자신이 심은 것은 모두 꽃이 피지 않았다. 중국의 중 홍원이 정천익의 집에 이르러 목면을 보고는 너무 기뻐 울면서 말하기를, ‘오늘날 다시 본토의 물건을 볼 줄은 생각하지 못했습니다’라고 하였다. 정천익은 그를 머물게 하여 며칠 동안을 대접한 후에 이내 실 뽑고 베 짜는 기술을 물으니, 홍원이 그 상세한 것을 자세히 말하여 주고 또 기구까지 만들어 주었다. 정천익이 그 집 여종에게 가르쳐서 베를 짜서 1필을 만드니, 이웃 마을에서 전하여 서로 배워 알아서 한 고을에 보급되고, 10년이 되지 않아서 또 한 나라에 보급되었다.”
여기서 목화 재배에 큰 공을 세운 것으로 등장하는 정천익은 문익점의 두 번째 부인의 아버지, 즉 문익점의 장인이었다.
그때까지 우리나라 의류 원료는 삼베, 모시, 명주가 대부분이었고, 값비싼 비단은 소수 상류층들만이 입을 수 있었다. 그러던 중 문익점에 의해 처음 재배에 성공한 목화는 매우 빠른 속도로 보급되기에 이르렀다. 기존 원료에 비해 생산이 쉽고 보온성이 뛰어난 솜과 무명이 널리 사용되기 시작하자 일반민들의 의생활이 크게 개선되었던 것이다. 문익점이 죽은 얼마 후 권근은 목면이 널리 보급된 상황을 가리켜 “온 나라에 널리 퍼지게 되어, 모든 백성들이 상하가 모두 이를 입게 되었다” 라고 할 정도였다.
이러한 공로를 인정받아 문익점은 1375년에 전의주부로 임명되어 중앙정계에 복귀하였다. 이후 관직이 계속 올라 창왕 때에는 좌사의대부에 이르렀다. 그러나 조준 등이 추진했던 사전개혁에 반대한 까닭에 탄핵을 받아 파면당하였고, 조선 개국 이후로도 등용되지 못하였다. 문익점은 1398년(태조 7) 6월에 70세를 일기로 고향인 강성현에서 눈을 감았다.
출처 - 우리역사넷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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