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국사
고려시대 김구에 대해 알아보자
명문장으로 외교에 공을 세우다
김구는 고려 후기의 문신이다. 무신집권기 후반부터 대몽항쟁기를 거쳐 원 간섭기 초기까지 관리로 활동하면서 몽골에 보내는 외교 문서 작성에 크게 공헌하였다. 문집으로 『지포집』이 전해진다.
촉망받던 젊은 인재, 풍파에 시달리다
김구의 자는 차산, 본관은 부녕현이었다. 어린 시절 이름은 백일이었다. 고려 시대에는 성인이 된 후 이름을 고치는 일이 드물지 않았다. 그의 선대에 대해서는 기록이 명확하지 않아 다소 이견이 있다. 그러나 아버지인 김정립은 1204년에 과거에 급제하여 관리가 되었으니, 김구는 개경 관리 집안의 자제로 태어났다. 어릴 때부터 글을 잘 지었던 김구는 17세에 예비고시인 국자감시에 합격하고, 22세였던 1232년에 본고시인 예부시에 급제하여 관리의 자격을 획득하였다. 이렇게 대를 이어 학업에 힘써 과거에 급제하는 것은 당시 명예로운 일로 칭송받았다. 더구나 급제 석차가 장원에 이은 2등이었으니, 젊은 김구는 상당히 주목을 받았을 것이다. 과거에 급제하면 개경 시가에서 풍악을 울리며 행진을 시켜주고 고향에 돌아가면 지방관과 향리들이 영접하여 잔치를 열어주는 등, 나라에서 큰 영예를 내려주었다. 젊은 김구는 아마 앞으로 관리로서 활약할 미래를 가슴 벅차게 꿈꾸었을 것이다.
사연은 알 수 없지만, 누군가 그런 김구를 질투하였던 모양이다. 황각보라는 고향 사람이었다. 김구가 관직을 임명받을 찰나, 황각보가 관아에 고발을 하였다. 김구의 선대에 흠결이 있다는 제보였다. 이 흠결에 대해서는 뒤에서 다시 이야기하기로 하고, 우선 문제가 생긴 김구의 출사에 대해 살펴보자. 내용이 전해지지 않는 이 제보는 상당히 치명적인 내용이었던 듯하다. 당시를 호령하던 무신집정 최이가 김구의 재주를 아껴 구제하려 했는데도 실패하여, 원래 임명하려 하였던 관직이 아니라 멀리 떨어진 제주도에 발령을 해야 했다고 하니 말이다.(이후 서술에서 특별한 별도 전거가 붙어있지 않다면 대체로 열전에 수록된 내용이다.)
후대의 기록이라 사실 여부를 단언하기는 어려우나, 제주로 간 김구는 돌담장을 세워 토지 구획을 명확히 하여 이전에 문제가 되었던 토지 겸병과 사슴·말의 곡식 훼손을 막는 공을 세웠다고 한다. 임기를 마친 뒤에는 드디어 개경으로 올라와 한림원의 관직을 받았고, 곧이어 서장관으로 몽골에 가는 외교 사절단에 배속되었다. 1240년, 그의 나이 30세 때였다. 당시 고려는 1231년(고종 18) 이래로 몽골의 침입을 버티고 있었다. 이른바 ‘대몽항쟁기’라 불렸던 시기였다. 어려운 상황에서 파견된 사절단의 일원으로서 김구는 어떤 소감을 느꼈을까. 이때 지은 글을 모아 『북정록』으로 펴내었다고 하는데, 안타깝게도 지금은 전해지지 않는다. 다만 서경을 지나며 황량해진 풍경에 안타까워했던 시, 대몽항쟁 과정에서 처절하게 항쟁하다가 도륙당한 철주를 지나며 그들을 기린 시 등이 몇 수 전한다.
이후 김구는 한림원에서 8년 동안 근무하였고, 국학의 종5품 관직인 직강에 올랐다. 전쟁이 계속되고 있었지만, 김구 개인의 관직 생활은 비교적 평온했던 듯하다. 그러나 다시 한 번 풍파가 닥쳐왔다. 최이의 아들로 권력을 승계받아 당시 집권하고 있었던 최항의 심기를 거슬렀던 것이다. 1247년에 최항은 김구에게 자신이 조성한 『원각경』에 발문을 짓게 하였는데, 그 글의 내용을 보고 “나에게 입을 닫고 있으라는 것이냐!”며 분노하여 좌천시켜버렸다. 최항은 극도로 권력에 예민하여 많은 조정 중신들을 유배 보내고 죽이는 등의 만행을 저질렀다. 김구가 정말 그런 의도로 적은 것을 최항이 간파한 것인지, 아니면 그가 도둑이 제 발 저린 격으로 곡해를 한 것인지는 알 수 없다. 그러나 김구는 속절없이 좌천되었고, 최항이 죽을 때까지 다시 관직에 오르지 못하였다. 이때 아마도 부안으로 내려가 살며 후학들을 가르쳤던 것으로 추정된다.
출처 - 우리역사넷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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