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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국사

담판하면 나지 서희
서희는 고려 3대 국왕인 광종대부터 5대 국왕인 성종대까지 활발하게 활동했던 정치가로, 거란과의 1차 전쟁에서 외교적 협상으로 큰 공을 세운 인물이다. 전쟁이 끝난 후에는 한반도 서북부 일대에 이른바 강동6주라 불리는 거점을 세워 이후의 외침에 대비하는 데에 중요한 업적을 남겼다.

가계와 출사
서희는 광종대의 명신 서필의 아들이다. 자는 염윤이었다. 『고려사』에서 서필이 이천 사람이라 하였으므로, 그의 집안은 지금의 경기도 이천 지역 출신으로 보인다. 서희의 조부인 신일이 현재 이천 서씨의 시조로 모셔지고 있다.

서희가 처음으로 관직에 나아간 것은 광종대의 일이었다. 18세였던 960년에 우수한 성적으로 과거에 급제하여 아버지의 뒤를 이어 관직자의 길에 들어선 서희는 이후 승진을 거듭하여 광평원외랑과 내의시랑을 거쳤다.

972년 8월에는 송나라에 파견되는 사신단의 정사로 임명되었다. 이때의 사신단 파견은 10여 년 만에 이루어진 것이었다. 따라서 이 사신단의 대표인 정사가 된 것은 당시 서희가 상당히 높은 평가를 받고 있었음을 말해준다. 당시 서희의 행동이 법도에 잘 맞아, 송나라 태조가 이를 높이 여겨 검교병부상서부사·내봉경으로 임명하였다고 한다.

이렇게 광종대에 활발한 활동을 하였던 서희였지만, 다음 국왕인 경종 시대에 그가 어떤 활동을 했는지에 대해서는 전해지는 것이 없다. 고려 초의 자료가 여러 차례의 전쟁을 거치며 대부분 유실되었기 때문이다. 그러나 그 뒤 성종대의 기록에서 서희는 다시 중요한 역할로 등장한다. 983년에 서희는 좌승을 거쳐 병관어사로 승진했다. 이는 지금의 국방부 장관에 비교할 수 있는 요직이었다.

이 시기의 기록에 서희의 강직한 성품을 엿볼 수 있게 하는 일화가 전해진다. 당시 국왕 성종이 서경에 행차하여 영명사라는 사찰 일대에 가서 즐기려 하자 간언을 올려 중지하게 하였다는 것이다. 성종은 이에 그 계획을 중단하고, 서희에게 바른 건의를 한 상으로 안장과 말을 하사했다고 한다. 이후 서희는 승진하여 내사시랑에 올랐다.

출처 - 우리역사넷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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