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국사
고려의 건국자 왕건
한반도를 재통일한 고려의 건국자
고려를 세워 후삼국을 통일한 태조 왕건은 877년에 태어나 943년에 사망하였다. 지금의 개성인 송악의 호족 집안에서 태어났으며, 처음에는 후고구려를 세운 궁예의 부하로 있다가 그를 제거하고 왕위를 차지하여 918년에 고려를 세웠다. 이후 후삼국 시대의 전란 속에서 신라의 항복을 받고, 이어 견훤이 세운 후백제를 무력으로 꺾어 936년에 통일을 달성하였다.
그의 아버지는 용건이며 어머니는 위숙왕후로 추봉된 한씨였다. 29명의 부인을 두었고, 그 사이에서 26명의 왕자와 9명의 공주를 자녀로 얻었다. 능은 현릉이며, 시호는 신성이다.
송악 출신의 젊은 호족, 궁예의 휘하로 들어가다
신라가 고구려와 백제를 꺾고 한반도의 통일을 이룬 것은 668년의 일이었다. 이로부터 시작된 통일신라는 8세기 중반을 지나며 점차 혼란에 빠져들었다. 중앙의 귀족들이 왕위와 권력을 둘러싸고 극심한 권력 투쟁에 돌입했고, 시간이 흐를수록 백성들의 삶은 피폐해졌다. 이에 전국적으로 조세 납부를 거부하는 현상이 발생하였으며, 지역별로 유력자들을 중심으로 단결하여 경주의 신라 조정에서 이탈하는 경향이 급속도로 심해졌다. 이러한 유력자들을 호족 혹은 성주·장군이라 통칭한다. 한반도 전역에서 수많은 호족들이 등장했고, 그 중 가장 두각을 드러낸 것은 훗날 후고구려를 세우는 궁예와 후백제를 세우는 견훤이었다. 이들은 각각 현재의 철원과 전주에 근거지를 마련하고 주변의 호족들을 포섭 혹은 제압하며 세력을 키웠다.
궁예가 강원도 일대를 점령하며 기세를 올리자, 그 주변의 호족들은 자신의 입장을 정해야 했다. 896년(진성여왕 10), 송악은 궁예에게 귀부하는 길을 선택하였다. 용건, 즉 왕융은 “대왕께서 만약 조선·숙신·변한 땅의 왕이 되고자 하신다면, 먼저 송악에 성을 쌓고 저의 장자를 성주로 삼는 것 만한 것이 없습니다.”라고 하고 하였다. 이에 왕건은 20세의 나이에 발어참성을 쌓고 그 성주에 임명되며 궁예의 조정에 들어섰다. 그리고 이들의 근거지인 송악은 궁예 세력의 도읍이 되었다. 이후 궁예의 세력은 날로 확장되어, 점차 지금의 황해도와 경기도 지역까지 그 판도에 들어가게 되었다.
왕건, 궁예 군을 이끌고 전장을 누비다
궁예는 자신의 휘하로 들어온 젊은 왕건을 중용했다. 『고려사』와 『고려사절요』에 따르면 900년에 궁예는 왕건에게 군의 지휘를 맡겨 경기도 남부와 충청도 북부 지역을 공략하도록 하였고, 왕건은 그 기대에 부응하여 큰 성과를 거두었다. 광주·충주·청주·당성·괴양 등의 군현을 성공적으로 공략한 왕건에게 궁예는 아찬을 제수하여 포상하였다. 궁예는 왕건에게 계속 중요한 임무를 맡겼다. 903년에 왕건은 수군을 이끌고 바다를 통해 후백제의 후방 깊숙이 위치한 금성군을 공략하는 임무를 수행하였다. 지금의 나주 지역이다. 이는 전략적으로 상당히 파격적이면서 위험도가 높은 임무였다. 왕건은 금성군과 그 주변 10여 군현을 공격하여 점령하는 엄청난 전과를 올렸다. 이를 통해 궁예는 견훤의 영역 배후에 군사적 거점을 마련하는 한편, 후백제가 중국 대륙과 왕래하는 것을 견제할 수 있었다. 또 왕건은 이곳의 호족인 다련군의 딸을 두 번째 부인으로 맞이하였다. 그녀가 바로 훗날 2대 국왕으로 즉위하는 왕무를 낳는 장화왕후 오씨이니, 왕건에게도 이 임무는 중요한 의미가 있었다고 하겠다. 그가 무려 29명의 부인을 두게 되는 것은 이렇듯 유력한 호족이나 부하들과 혼인을 통해 결속을 다졌던 결과였다.
이 뒤로도 왕건은 승승장구하였다. 최전방에서 후백제군과 치열한 전투를 거듭하였고, 그러한 노력과 성공의 대가로 913년(수덕만세 3)에는 파진찬에 올라 시중이 되었다. 이 시점까지 궁예와 왕건의 만남은 서로에게 큰 도움이 되었다고도 할 수 있을 것이다. 궁예는 왕건을 등용하여 자기 세력의 판도를 크게 넓힐 수 있었고, 왕건은 궁예의 조정에서 높은 관직에 오를 수 있었으니 말이다. 『고려사절요』에는 당시 궁예가 기뻐하여 좌우의 신하들을 보고 말하기를, “나의 여러 장수들 중에 누가 견줄 수 있겠는가.”라고 하였다는 에피소드가 전해진다.
출처 -우리역사넷-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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