prev_page

한국사

원효대사 들어보셨죠?
원효는 7세기에 활동한 신라 승려였다. 여러 불경을 읽고 큰 깨달음을 얻은 후 그는 불교 사상과 종파 사이의 치열한 대결을 전심으로 통일해야 한다고 주장했다.

원효대사의 출생
원효의 원래 성은 설씨이고 어릴 때 이름은 서당이었는데, 출가하여 원효라는 법명을 가지게 된다. 할아버지는 잉피공, 아버지는 나마를 지낸 담날이다. 그는 617년 지금의 경북 경산시 자인면 혹은 압량면 지역에 해당하는 압량군 남쪽 불지촌 북쪽 밤골 사라수 아래에서 태어났다고 한다. 그러나 설씨가 보통 6두품에 해당하는 귀족이었고, 그의 부친이 중앙귀족에게만 수여하는 경위 11등 관등인 나마를 소지했던 점을 고려한다면, 그의 집안은 신라 왕경 경주와 연관이 있었던 것으로 보인다.

원효는 15세를 전후한 시기에 출가하여 승려가 되었는데, 특정한 스승 밑에서 경전을 배우지는 않았고, 여러 곳을 돌아다니면서 불법을 공부하였다. 혜숙, 혜공, 대안, 낭지 등 당시 유명한 신라 승려들과 교류하면서 영향을 받은 것으로 알려져 있는데, 이들은 대부분 중생의 구제를 목표로 하던 대승불교적 성향을 보여준다. 또 고구려에서 망명해 완산주에 와 있던 보덕을 스승으로 삼았다는 전승도 있으며, 시기적으로 봐서 자장에게 가르침을 받았을 가능성도 있다.

그는 타고난 총명함을 바탕으로 스스로 불경을 공부하고 수행다가, 650년 보다 높은 수준에 도달하고자, 함께 불법에 정진하던 8살 연하의 동료 의상과 함께 당 유학길에 오른다. 그러나 요동에서 고구려군에 잡혀 돌아올 수밖에 없었다. 이후 661년 에 두 사람은 다시 유학을 시도하는데, 도중에 밤이 되어 무덤 사이에서 잠을 청하게 되었다. 심한 갈증을 느껴 어둠 속에서 샘물을 손으로 떠 마셨는데, 물맛이 좋고 시원하였다. 하지만 날이 밝고 보니 그것은 해골에 고인 물이었고, 이를 알게 된 원효는 역해서 모두 토할 것 같았다. 이때 그는 홀연히 모든 것은 마음에 달려있다는 ‘일체유심조’의 깨달음을 얻게 되고, 굳이 유학을 갈 필요가 없어져 의상과 헤어져 돌아온다.

그리고 스스로의 깨달음을 바탕으로 중국 고승들이나 유학승들에 전혀 뒤지지 않고, 오히려 그것을 능가하는 사상과 학문적 성취를 이루게 된다.

파계를 저지르고 얽매이지 않는 위대한 승려가 되다
하루 밤에 깨달음을 얻은 원효는 형식이나 계율에 얽매이지 않는 파격적인 행보를 보인 것으로 유명하다. 당 유학을 중단하고 돌아온 이후 얼마 지나지 않아, 태종무열왕의 둘째 딸로 남편을 잃고 혼자 요석궁에 있던 공주와 함께 살고 아이를 낳은 파계를 저지르게 된다. 이때 낳은 아들이 이두를 정리하고 발전시킨 것으로 유명한 설총이다. 그 후 그는 승복을 벗고 자신을 소성거사라 부르며, 기이한 행동을 일삼았다. 하지만 그의 이러한 행동들은 단순한 일탈이 아니라, 불교의 깊은 이치를 깨닫고 그것을 널리 퍼트리고 실천하기 위한 것이었다.

우연히 광대들이 굴리는 커다란 박을 보고는, 그 모양을 본 딴 도구를 만들어 가지고 여러 곳을 돌아다니면서 춤추고 노래 불렀다. 그 노래는 『화엄경』의 “일체 얽매이지 않는 사람은 한 번에 생사를 벗어난다.”는 구절에서 따온 무애가로, 불교 교리를 쉽게 풀어 누구나 부를 수 있게 만든 것이다. 사람들에게 그 노래를 가르쳐 부르게 하여, 누구나 부처님을 알고 쉽게 그 가르침을 따를 수 있도록 한 것이다.

파계 이후 그의 기행은 대중 속에 스며들어 그들과 함께 살면서 불법을 전하려 한 교화의 방편이었던 것이다. 원효는 고고한 고승의 모습을 포기하고 불교 대중화를 통해, 지배층 중심 불교에서 대중 불교로의 확산을 이룩한 위대한 종교가였던 것이다.

공유하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