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국사
5만원권 그려진 그분에 대해 알아봅시다!
현모양처의 화신으로 기억되는 여류 화가
신사임당은 조선 중기의 여성 화가요 문사였으며, 율곡 이이의 어머니로 유명하다. 신사임당은 연산군 10년(1504) 음력 10월 29일에 강릉에서 태어났으며, 명종 6년(1551) 음력 5월 17일 48세의 나이로 세상을 떠났다. 화가로서 이름이 높았는데 특히 포도와 풀벌레를 잘 그렸다는 기록이 남아 있다. 사임당이라는 당호는 ‘태임을 본받는다.’ 하는 뜻인데, 태임은 현숙한 부인의 전형으로 이름난 중국 고대 주 문왕의 어머니를 가리킨다.
가족
신사임당의 아버지는 진사 신명화였으며, 어머니는 용인 이씨로 이사온의 따님이었다. 신명화는 평산 신씨로 중종 11년(1516) 진사시에 합격하였는데, 당시 윤은보나 남효의 등이 현량과에 천거하려 했으나 사양했다고 한다. 그는 용인 이씨와 결혼하여 아들 없이 딸만 다섯을 두었는데, 신사임당은 그 가운데 둘째 딸이었다.
율곡 이이는 자신의 외조부인 신명화의 행장을 지었다. 행장에는 성리학 의례를 엄격하게 준수하였던 선비의 모습 뿐 아니라 딸들을 교육시키는 데에도 힘썼던 그의 모습이 그려져 있다.
신명화는 신사임당을 결혼시킨 해인 중종 17년(1522) 서울에서 세상을 떠났다. 하지만 신사임당의 어머니인 이씨 부인은 그 뒤에도 계속 강릉에서 생활하였는데, 강릉은 이씨 부인의 어머니 쪽 집안인 최씨가 세거하던 지역이었다. 신사임당의 아버지는 처가의 세거지에 정착하였고, 어머니와 딸이 이어서 그 지역을 지켰던 것으로 보인다. 신사임당 또한 강릉에서 태어났고, 결혼 이후에도 상당 기간은 강릉에서 생활하였다. 그래서 율곡 이이도 강릉에서 태어나게 되었던 것이다.
율곡 이이는 자신의 외조모인 용인 이씨의 묘지명을 지었다. 거기에는 외조모의 가계와 결혼 후의 일화가 실려 있는데, 이씨는 남편을 살리기 위해 손가락을 잘랐던 일로 중종[조선]으로부터 정문을 받았다고 한다.
율곡 이이는 자신의 외조모가 남편을 살리기 위해 손가락을 잘랐던 일에 대해 따로 「이씨감천기」를 지었다. 율곡은 자신의 외할머니에 대해서, ‘부부의 정이 두텁지 않은 것이 아니었으나 어버이를 모시기 위하여 16년이나 떨어져 사셨고, 진사께서 질병이 나셨을 적에는 마침내 지성으로 빌어 하늘의 뜻을 감동시켰으니, 빼어난 사람의 행실과 옛사람을 초월하는 절의가 아니고서야 어찌 이렇게 할 수 있었겠는가?’ 하였다.
신사임당은 중종 17년(1522) 이원수와 결혼하였고, 이선, 이번, 이이, 이우의 네 아들을 두었고, 조대남, 윤섭, 홍천우에게 출가한 세 딸을 두었다. 남편인 이원수의 자는 덕형이며 이름을 난수라고도 하였다. 그는 과거에 급제하지는 못했던 것으로 보이며 벼슬은 사헌부 감찰에 이르렀다. 청송 성수침이 지었다는 이원수의 지문에 따르면, 이원수는 성격이 착실하고 꾸밈이 없었으며 너그럽고 겸손하여 옛 사람의 기풍이 있었다고 한다.
송시열은 이원수의 묘표를 지었는데, 『송자대전』 193권에 실린 감찰증좌찬성이공묘표가 그것이다. 송시열은 율곡이 동국 유학의 정통을 밝혀 이름이 후세에 전하게 되었으니, 율곡의 부친인 이원수 또한 이름이 길이 남게 되었다고 하면서 이원수와 신사임당으로부터 이어지는 후손들의 가계를 상세히 밝혔다.
신사임당의 셋째 아들이 조선시대의 대표적인 성리학자이자 경세가이며 문신인 율곡 이이이다. 율곡 이이 때문에 이원수는 의정부 좌찬성에 추증되었으며, 신사임당도 정경부인에 추증되었다.
신사임당의 예술적 재능은 큰 딸인 매창과 넷째 아들인 옥산 이우에게 이어졌다고 한다. 매창은 시와 그림에 능하였으며, 이우는 거문고, 글씨, 시, 그림의 네 가지에 뛰어나 사절이라 불렸다.
출처 - 우리역사넷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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